Skip to content

아름다운 사람

뭐라도 읽어야겠어서 책장을 한참 쳐다보다 Yasunari Kawabata의 ‘Palm of the Hand Stories’를 펼쳤습니다.

‘12.97 from 하이람’

이라고 맨 앞장에 내가 써놓았네요.

97년 12월. 한국엔 IMF가 터졌었고, LA는 엘리뇨현상인가 하여 한달 내내 폭우가 그치지 않고 왔었습니다.

나는 그 어린 나이에 외로왔고 피곤했고 뭘 어찌해야하는 지 몰랐었습니다. 갑자기 어른이 되어 버린 20대 초반들이 다 그렇듯이.

하이람은 며칠있다가 부모님집에 갈껀데 그 전에 선물 주고 싶어 왔다며 카드와 향수와 이 책을 들고 집 앞에 왔었어요. 난 그 전에도 그랬듯이 문 밖에서 냉담하게 알았다 고맙다 그 말 만 하곤 받아왔죠.

카드에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story가 page 12의 The Grasshopper and the Bell Cricket이라 써 있더군요.

그 당시 LA 날씨가 평소처럼 눈부시게 맑었더라면, page 12를 먼저 읽지 않고 첫장부터 읽었더라면, 아마 난 또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영어공부나 한다 생각하고 네 페이지짜리 short story를 두번째 읽고 세번째 읽다, 울었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는 사람이 있구나, 이런 글을 읽고 느끼는 사람이 있구나, 그랬습니다.

그 후로 난 하이람이 들려주는 음악이, 틀어주는 영화가, 책장의 책들이 귀에,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곧 깨달았죠.

아, 사람이 아름다울 수 있는 거구나, 라구요.

97년 겨울부터 이날 이때까지 이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한번도 이 믿음에 배신을 한 적이 없네요, 우리 하이람은.

예나 지금이나 밖에서 거지같은 것들 상대하다 파김치가 되어 집에 들어와 우리 남편 눈을 보면, 난 아무 말도 못하게 됩니다. 저렇게 날 쳐다 보는 사람한테, 저런 눈을 가진 사람한테, 밖에서 격은 거지같은 인간들 얘기를 차마 못하겠었어요. 이게 우리가 대화가 없는 이유입니다.

네, 나만큼 행복한 여자가 어디 또 있을까요. 십 수년이 지나도 내 눈에 아름다운 사람을 남편으로 두고 사는 여자가 또 어디 있나요.

그런데도 난 가끔가다 이렇게 슬퍼집니다.

서점 가득 빼곡한 책 중에 야스나리 가와바타처럼 글을 쓸 수 있는 작가가 많이 없거든요.

수 억 인구중에 내 눈에 아름다운 사람 아직은 하이람 딱 한 사람 뿐이거든요.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도 쭉 난 세상에 나가 전혀 아름답지 못한, page 12를 읽어보지도, 읽을 생각도, 읽는다 한 들 알아듣지도 못할, 사람들과 매일 매일을 살아야 하거든요.

정말 전혀 아름답지 못한 인간들을 때론 이해하고 토닥이고 타협하고 대화하고 인정하고 억지로 좋아도 하며 살아야 하거든요. 그리고 때론 정도 들어 헤어지면 그리워 하기도 보고싶어하기도 하며 이건 또 뭔가 헷갈려 하며 살아야 하거든요.

뭐, page 12를 읽고 울 줄도 아는 수준 높은 내가 참아야 할 삶의 여정, 일부이갔죠, 뭐.

^^또 자뻑 마무리..

One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