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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다 안다

-어디가서 뭐 먹을까 빨리 말해. 한식, 일식, 이탈리안? – ë°° 별로 안 고파. – 그럼 뭐 마실래? 소주, 사케, 와인? – 그냥 압구정 하시가자. – 그래.

나의 현 베프와 만날 만나면 차 안에서 시작하는 대화다. 그러구선 새우튀김이나 메로구이등을 안주로 시켜놓고 하는 얘기란 것이. 제대로 된 남자 참 없단 얘기, 회사 짜증난단 얘기, 이 옷 진짜 싸게 잘 샀단 얘기, 누구 안나가나 면세점 또 한번 가야된단 얘기, x종이는 또 전화 씹는단 얘기, 애들 다 이쁘게 생겨서 왜 남친들이 없는지 모르겠단 얘기. 늘 이 비스무리한 얘기다. 술과 수다와 샤핑 정도가 우리가 하는 스트레스 해소다.

그러구선 들어와 며칠 전 인터넷으로 주문한 공지영의 <도가니>를 읽었다. 태어나기를 불행하게 태어난 사람들에게 세상은 얼마나 가혹한가 또 잔인한가 하는 고발을 담은 소설.

꿀꿀한 월요일 지하철타고 퇴근하는 길에, 겨우 8시가 넘었을 뿐인데 만취해 앞에서 휘청거리는 양복입고 멀쩡하게 생기신 아저씨를 봤다. 오늘 11월 1일 월요일인데.

내 눈엔 다 보인다.

어디서 얼마나 당하며 살았는지, tip 한 푼 못 받고 일하면서 군기가 바짝들어 내 앞에서 90도로 수그리며 꾸벅 인사하곤 돌아가던 중국집 배달원. 비가 그렇게 퍼붓는데 뛰쳐나와 차 key 받아가던 발렛 파킹 보이. 버스정거장 앞이라 먼지 엄청 뒤집어 쓰실텐데 하루종일 쭈그리고 앉아 나물이나 참기름이나 옥수수나 등등을 팔고 계신 할머니. 사무실 화장실 바닥에 철퍼덕 앉아 대걸래 빨아 말린 거 손질하고 계시던 아줌마. 겉으로만 멀쩡히 양복 입고 출근하면 뭐하나. 월요일 이른 저녁부터 술을 풀 수 밖에 없는 현실, 모든 직장인의 비애를 대변하던 오늘 그 아저씨.

그 뿐일까. 내가 좋은 동네 살며, 좋은 데로만 놀러 다니니 그 뿐만 보이는 것이지, 얼마나 험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을까. 들리지도 않고 말도 못하는 농아 아이들에 대한 폭행이 비단 그 소설 속의 아이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지.

난 앞으로도 먹고 싶은 음식먹고 입고 싶은 옷 사 입고 다음 연휴땐 어디로 놀러갈까 하는 고민을 하며 살겠지만, 그러나 나도 다 안다. 다 보이고, 다 들린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세상은 처음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쭉 하나도 공평하지 않을 것인데, 그게 불변의 진리인데,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는 당연히 없다.

누군가의 눈엔 힘없고 빽없고 돈없고 미래도 없어보이는 참 초라해 보일 수도 있는 나또한, 아무에게도 힘들다 도와달라 그러고 살지 않는데, 알기 때문이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단 걸. 다 내 몫이라는 걸. 원래 이렇다는 걸.

16년만에 겨울을 처음 맞아본다. 그런데 난 신기하게도 춥단 소리를 안한다. 겨울은 원래 뼈속까지 시리게 추운 법이란 걸 이젠 아니까 춥단 소리를 안한다.

요번 Super K2 우승자 허각은 중졸 학력임에도 꿈을 버리지 않았단 소리들을 한다. 노래를 하고 싶어하는 가수 지망생에게 중졸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이 어딜가나 꼭 따라다녀야만 할까.   

오스카 와일드는 삶은 정말 소중해서 진지하게 말할 하찮은 것이 아니란 말을 했단다.

오늘은 말이 많다,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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