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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2

“열흘 전에 오셨었네요? 증상이 어때요?”

“똑 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운전을 했는데요, 손가락에 감각이 없어요. 누가 대신 해 준 것 같고 내 손이 한 게 아닌 것 같아요. 분명 내가 걷는 거 맞는 데 이게 내 다리가 아닌 것 같고. 분명 내가 말을 했는데 내 귀엔 내 목소리가 아닌 듯. 금방 먹은 이 삼계죽이 닭고기인지 돼지고기인지 구별이 안돼요. 점심에도 저녁에도 먹고 싶은 음식이 없고, 먹어서 뭐 하나 싶구요. 눈에 초점이 없고 멍해요. 내가 쳐다보고 있는 눈 앞의 사물이 어쩌면 실체가 아닐 수 있단 생각이 들기도 해요. 다시 태어나고 싶기도 하고, 갑자기 눈물이 나기도 하고요..”

내 증상이 이렇다 말을 하려다가 완전 중증 정신병자 취급을 받지 싶어 그냥,

“기침 가래가 심해요”

하고 처방을 받아 왔다.

난 자연치유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감기에 걸렸을 땐 내 몸이 스스로 낫기 위해 열도 내고 콧물도 가래도 기침도 만들어 싸우는 것이라 여기고 약 먹기를 거부했었는데, 자연치유는 개뿔. 당장 살기 위해서 그 센 처방약을 털어 넣었다.

우리는 다 연습 없이 인생을 산다. 단 한번뿐이기에 추억이 아름다운 것이라 한다.

갑자기 Culver City 우리 집이 생각났다. 처음 우연히 그 집을 그냥 구경하러 들어갔던 날도. 너무 그 집이 마음에 들어 집을 보고 나와 건너편 벤치에 멍하니 앉아, 과연 앞으로 저렇게 맘에 드는 집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랬었는데.

그 집에서 살던 4년 내내 난 그 집을 정말 미친 듯이 좋아했었는데.

물론 또 다시 내가 살고 싶은 동네에 구조가 마음에 드는 집을 사겠지. 그리곤 집과 어울리는 가구를 들이고 꽃을 가꾸고 하겠지.

근데 그 집이 아니잖아. 내가 정말 미친 듯이 좋아했던 딱 나와 어울리는 그 집이 아니잖아.

우린 다 딱 하루뿐일 오늘을 사는데 왜 매번 모르는 걸까. 오늘은 딱 한번뿐이란 걸.

오늘 난 이제와 보니 딱 하루뿐이었던 과거의 어느 날을 떠올리며 산다. 그땐 그 날이 딱 한번뿐이란 걸 몰랐음을 깨달으며.

어쩌면 매일을 이렇게 살았었다. 지금 생각하니 미친 듯이 좋아했던 우리 집에서 난 매일을 미친 듯이 행복해하지 않았거든.

오늘 나는 아마도 몇 년 후엔 다시는 내 거주지가 되지 않을 서울에서 산다. 이 혹독한 추위와 감기를 견디며 딱 하루뿐일 오늘을 서울에서 산다.

딱 한번뿐이니 오늘을 잘 살아야 하는데, 머리로는 알겠는데,

오늘 난 손과 팔과 다리에 감각이 없고, 시각 청각 후각 미각 다 제 구실을 못하며,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련다 하는 의지가 없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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